넷-책

스푸트니크의 연인 - 무라카미 하루키

주황 2012. 3. 4. 13:38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항상 가벼운 혼란에 휩싸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제에 따라다니는 고전적인 패러독스에 발목을 붙잡히기 때문이다. 즉, 순수한 정보량을 두고 말한다면 나 이상으로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내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기에서 설명되는 나는 필연적으로 그 설명을 하는 나에 의해(그 가치관이나 감각의 척도, 관찰자로서의 능력, 여러 가지 현실적 이해 관계에 의해) 취사 선택된다.
그렇다면 거거서 설명되는 '나'의 모습에 어느 정도의 객관적 진실이 있을까? 나는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린다. 아니, 예전부터 일관성 있게 마음에 걸렸던 문제다. 
-78p-
 
"어떤 시기인데?"
"때늦은 사춘기라고 해야 되나,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내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어. 자칫하면 내가 나 자신에게 따돌림을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어쨌든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좋은 거 아냐?"
"그럼 나 자신을 잃어버린 나는 대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거야?"
-87p, 88p-

그리고 나는 지금 이렇게 닫혀진 회로 안에서 같은 길을 반복적으로 돌고 있다. 어디에도 종착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반복적인 회전을 그만둘 수 없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다.
-110p-

우리는 둘 다 지혜다운 지혜도 갖추지 못했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기량도 갖추지 못했다. 의지할 수 있는 기둥도 없었다. 우리는 끝없는 제로에 가까웠다. 하나의 무에서 또 다른 무로 흘러갈 뿐인 초라한 존재였다.
-118p-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멀리서 보면 유성처럼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인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두 개의 위성이 그려 내는 궤도가 우연히 겹쳐질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볼 수 있죠. 또는 마음을 합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잠깐,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의 틀 안에 갇이게 되는 거예요. 언젠가 완전히 연소되어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예요."
-161p, 162p-

사람에게는 각각 어떤 특별한 연대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특별한 것이 존재한다. 작은 불꽃 같은 것이다. 주의 깊고 운이 좋은 사람은 그것을 소중하게 유지하여 커다란 횃불로 승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하면 그 불꽃은 꺼져 버리고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스미레만이 아니였다. 나는 그녀와 함께 귀중한 불꽃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241p-

고독한 금속 덩어리인 그들은 차단막이 없는 우주의 암흑 속에서 우연히 마주쳣다가 순간적으로 스치면서 영원히 헤어져 버린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약속도 없이.
-24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