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 - 밀란 쿤데라
걸인들에 대한 그녀의 후한 인심 역시 그 기반은 부정적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아녜스가 그들에게 동냥을 베푸는 것은 그들이 인류의 한 통속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인류의 이방인이요, 인류로부터 배제된, 아마도 그녀처럼 인류와 연대를 상실한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인류와의 비연대성.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오직 한 가지, 즉 어떤 구체적인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만이 이 일탈로부터 그녀를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타인들의 운명이 그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그 운명에 의존하고 거기에 동참하는 까닭에 말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녀는 사람들의 고통, 그들의 전쟁과 그들의 휴가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한 느낌을 더는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생각이 그녀는 두려웠다. 정말 그녀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단 말인가?
-68~69
그녀가 베토벤의 음악에 사로잡혔다면 정말 음악 그자체에, 그의 그 음정들에 매료됐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음악이 표상하는 것, 다시 말해서 베티나와 그녀의 세대가 공유하는 이념이나 태도와 그의 음악 사이의 모호한 근친성에 매료됐던 것인가? 사실 예술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며 언제 존재한 것이 있었던가? 그것은 환상이 아닌가? 레닌이 베토벤의 열정을 가장 좋아한다고 선언했을 때, 실제로 그가 좋아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무엇을 들었는가? 음악을? 아니면 피와 우애와 교수형과 정의와 절대에 홀린, 자기 영혼의 화려한 움직임들을 상기시키는 어떤 고귀한 소란을 들었는가? 그는 음악을 들었는가, 아니면 그 음악을 통해 예술이나 아름다움과 전혀 무관한 어떤 몽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가?
-133~134
매일 점점 더 많은 얼굴들이 등장하고 그 얼굴들이 날이 갈수록 서로 닮아 가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자아의 독창성을 확인하고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유일성을 확신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덧셈 법과 뺄셈 법이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 냈다.(이 경우 연이은 뺄샘 때문에 자아가 0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로라의 방법은 정확히 그 반대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아를 동화했다.(이 경우 덧붙은 속성들 때문에, 자아의 본질을 상실해 버릴 위험이 있다.)
-162
묘한 일이다. 그녀는 베르나르에게 빠졌으면서도,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베르나르에게 빠졌고 바로 그래서 그에게 관심이 없었던 거라고 말이다.
(...)
왜냐하면 로라는 누군가를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인과 입맙춤을 너무 많이 하면 아기가 생기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처녀 같았다고나 할까! 언제부턴가 그녀는 거의 내내 베르나르 생각만 했다. 그의 몸, 그의 얼굴을 상상했고, 항상 그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가졌고, 온통 그의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으로 그를 안다고, 여태껏 그와 알고 지낸 다른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안다고 믿었다. 사랑의 감정은 이렇듯 상대를 안다는 환상으로 우리를 속여 넘기는 것이다.
-217
호모 센티멘탈리스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감정을 느낄 수 있으므로.) 감정을 가치로 정립한 사람으로 정의해야 한다. 감정이 하나의 가치로 간주되면 그때부터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느끼고 싶어하며, 또한 우리 모두가 우리의 가치들에 긍지를 느끼는 만큼 우리의 감정들을 전시하고자 하는 유혹이 커진다.
-314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치통을 과소평가하는 지식인의 말이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야말로 모든 생물을 포괄하는, 훨씬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이다. 나의 자아는 사유에 의해서는 당신의 자아와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은 많으나 생각은 적다. 우리 모두는 서로 전달하고 차용하고 서로 상대의 생각을 훔치기도 하면서 거의 동일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나의 발을 밟는다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다.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것이다. 고통을 당할 때는 고양이조차도 상호 교환이 불가능한 자신의 유일한 자아를 의심할 수 없다.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세상은 흔적 없이 사라지며, 우리들 각자는 자기 자신과 홀로 남는다.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인 것이다.
-325
"(...)독어에서는 동기로서의 이성을 'Grund'라고 하네. 라틴어의 'ratio'와 완전 무관한 이말은, 우선 지면을 가리키고, 또 토대를 가리키기도 해. 라틴어의 이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도로 위에 주저않은 그 아가씨의 행동은 부조리하고 터무니없으며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 행동에는 자신만의 이유, 말하자면 자신의 토대, 자신의 Grund가 있다네.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는, 우리 행위의 오래도록 변치 않을 동기라고나 할 Grund가 각인되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운명이 자라나네. 요사이 나는 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각각의 Grund를 파악하려고 노력 중인데, 갈수록 거기에는 어떤 은유의 성격이 있다는 확신이 든다네."
-380
그녀는 자아를 망각했고, 자아를 잃어버렸으며, 자아로부터 해방되었다. 바로 거기에 행복이 있었다.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