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밤이 선생이다 - 황현산
코드의 바탕 자체가 문제가는 이야기다. 잘못된 코드는 잘못된 그 만큼 더 강압적이다. 삶의 진실과 따로 노는 코드는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15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세상의 이름이 무엇이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이명박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33
난폭한 아이들에게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야 할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76
우리 안에 자신의 것으로 인겅하기 어려운 어떤 괴물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끌어내어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주체의 역량이기도 하다.
-90
맥락을 따진다는 것은 사람과 그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맥락 뒤에는 또다른 맥락이 있다. 이렇듯 삶의 깊이가 거기 있기에 맥락을 따지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일에 시간과 정성을 바치기보다는 행정 규정을 폭력적으로 들이미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다.
-97
망치로 두더지의 머리를 때리듯이 주인들이 억눌러버리거나 한쪽에 제쳐놓은 생각들을, 아니, 그 생각들보다 더 아래에 깔려 솟아오리지도 못하는 생각들을, 그래서 생각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생각들을 개는 주인들을 대신하여 생각하며, 이 겨울의 스산한 들판을 회색 꿈의 자리로 만든다. 그리고 또 거기서 비껴선다.
(...)
사람의 꿈은 사람 속에서 피어나 사람과 동행하지만 반드시 사람과 같은 방향에 시선을 두는 것은 아니다. 이 겨울의 개는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신이다.
-152
우리의 실패와 변화도 이 사소한 것들과 세상의 거창한 이론들이 맺게 되는 관계과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실패한다. 우리가 배웠던 것, 세상의 큰 목소리들이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들과 우리의 사소한 경험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고 엇나갈 때 우리는 실패한다. 우리들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더 큰 목소리들 앞에서는 항상 '당신의 사정'이다.
-176
마음속에 쌓인 기억이 없고 사물들 속에도 쌓아둔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날마다 세상을 처음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오직 앞이 있을 뿐 뒤가 없다.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사람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프다.
이 슬픔이 유행을 부른다.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과 교섭해온 흔적이 남지 않고, 사람이 진정한 기억으로 그 일관성을 얻지 못하면, 이 사람을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사람이 그 내부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밖에서 생산된 기호로 그것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가지가지 유행이 밖에서 생산된 바로 그 기호다. 밖에서 기호를 구해 의미릐 자리를 메울 때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밖의 기호 속에는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진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행의 문화는 열등감의 문화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인다.
현대의 다단한 문명을 만들기까지에는 권태에 대한 두려움이 큰 몫을 담당했다.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얻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수 있는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에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삼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능력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려는 관대한 마음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191~192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그 아버지의 아버지에 대한 이해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아버지에 대한 이해자체도 온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227
사실,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자각되지 않는 말들이고 진실과 부합되지 않는 말들이고 인습적인 말들이지, 반드시 어려운 말이 아니다. 어려운 말은 쉬워질 수 있지만, 인습적인 말은 더 인습적이 될뿐이다. 진실은 어렵게 표현될 수도 있고 쉽게 표현될 수도 있다. 진실하지 않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진실이야말로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것에 속한다.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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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참 깨끗하고 맑다는 느낌을 받았다.
본인의 말처럼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 맑고 정제된 언어들로 적어내려간 글들은 확신에 가득차 있다.
그래서 초반에는 조금 움찔했지만,(꼼짝마! 하는 느낌이랄까) 2부 3부 가서는 예전에 쓴 글들의 묶음이라서 그런지 조금은 부드럽게 다가왔다.